내 삶의 원동력은 만화였기에

2024. 6. 21. 13:43카테고리 없음

나의 추억은 한강 옆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만화와 게임을 좋아했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뭐 다들 어릴 때는 그렇지 않냐고 하겠지만 초등학교 때 투니버스를 보느라 학교까지 결석을 했을 정도라면 얼마나 만화에 빠져서 살았는지 짐작이 될까?

중학교 때는 애니메이션 감상 동아리에 들어가서 학교생활에 마음을 붙일 수 있었다.

고등하교 때도 만화 그리기 동아리를 들어서 만화를 그렸고, 터미네이터 영화와 월레스와 그로밋 만화를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젤 좋아했던 것은 내가 젤 좋아했던 아기공룡 둘리 만화책을 보며 수첩에 연필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동창에게도 내 그림 실력을 인정받았다.

바이오 하자드 게임 팬으로서 좀비나 바이러스 괴물들을 흉내 내며 친구들과 친해지기도 하였다.

그 외의 학창 시절은 나를 놀리고, 괴롭히는 학생들 때문에 녹록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만화와 그림이라는 나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온전히 만화와 그림에 집중하는 그 시간의 행복만큼은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덕에 그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렇게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만화에 몰입하는 시간들이 가장 행복했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만화를 보고 그려왔다.

공부는 안 하고 주야장천 만화에 매달려 있는 모습에 어머니께서는 나를 호되게 벌하셨다.

그렇게 혼이 나도 어머니 곁에 누워서 잠이 드는 것이 유일하게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너무 어릴 때 이혼을 하시는 바람에 더 이상의 추억은 없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를 혼내셨던 것이 먹고살기 힘이 들어서 나와버린 화풀이 같았다고 용서를 구하시는 눈물어린 편지를 받았던 것이 아직도 내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어머니께서는 일찍부터 아버지와 이혼을 하셔서 좋았던 추억이라곤 옆에 누워서 같이 잠들었던 기억뿐이다.

그런데도 그 편지가 마음을 울렸던 것을 보면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참 단순한 것 같다.

이후 해운대 바닷가가 있는 부산으로 이사를 한 뒤 누나와 나는 새어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남동생도 생겨서 같이 살게 되었다.

밖을 잘 안 나갔지만 천주교셨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성당 미사에는 참석을 했었다.

대학은 관광 비즈니스 영어과를 다니다가 나를 괴롭혔던 동창생을 다시 만나면서 다른 대학교의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지만 그곳에선 괴롭히는 사람들이 없어서 참 좋았다.

그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2년 동안 성실하게 일을 잘 수행했다.

그러던 중 부모님을 통해 송국클럽하우스를 알게 되었고, 잘 지내다 보면 취직이 된다는 정보를 얻어 송국클럽하우스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송국에서 내 그림 실력을 귀하게 봐주셔서 송국의 인스타 계정에 주기적으로 내 만화가 올라가게 되었다.

그렇게 송국을 다니면서 일도 많이 경험했다.

단기간 택배 아르바이트, 고등학교 설거지와 마감업무, 피자가게에서 설거지와 마감업무 등을 하였다.

어느 날부터 벼룩시장을 통해 어느 헬스장 청소를 하게 되었는데 일을 열심히 잘 한다고 헬스장 내에서 좋은 소문이 났다.

피부과 원장님께도 스카우트되어 투잡을 뛰는 등의 인정을 받아서 지금까지도 애견카페로 업종을 바꾸신 사장님 밑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오후에는 송국클럽하우스에서 지금까지도 만화를 그리며 송국클럽하우스와 회원들을 소개하는 업무를 도맡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트랜스포머와 유희왕 카드 등에 빠져서 나만의 힐링을 한다.

부모님께서는 더 잘 키워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시지만 나는 부모님께서 나에게 너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나를 위한 행복들을 만들어가고 있으니깐 말이다.